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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개요

Ⅱ. 독일인의 민족관

Ⅲ. 중국인의 민족관

Ⅳ. 한설야의 민족관

Ⅴ. 금강산법문의 민족관

참고문헌

본문내용

5일, 비) : 대종사, 장안사 전주지 현주지 대리를 접견.
제6일(5월6일, 맑음) : 오전 8시 장안사 - 금강구 - 신풍리 - 온정리를 거쳐, 도중에서 만난 新溪寺주지 金海雲의 안내로 만물상을 관람하고 온정리 금강여관 투숙. 대종사, 路毒으로 신열을 발함.
제7일(5월 7일, 비) : 휴식.
제8일(5월 8일, 구름비) : 극락현 - 신계사를 방문하고 오후 1시에 여관으로 돌아옴. 예수교신자인 여관주인의 독실한 신앙에 대하여 주목하고 종교신앙에 대하여 법문함.
제9일(5월 9일, 맑음) : 오전 8시에 출발하여 신풍리 - 금강구를 거쳐 오후 5시 30분에 기차에 승차, 철원을 거쳐 저녁 11시에 서울역 도착.
이상의 금강산 유람은 내금강 · 신금강 · 외금강 · 해금강에 있어서, 내금강 지역은 장안사 · 비로봉 등 문화 · 관광 지역을 대체로 관람을 하였으나, 유점사가 위치한 신금강까지는 이르지 못하였다. 그리고 외금강으로 옮겨 신계사 · 만물상 등은 보았으므로 총석정 등이 위치한 해금강은 제외되어 있다.
그런데 대종사는 법문을 통하여,
<10>당처의 금강산을 상대하니 기괴한 峰련과 絶佳한 풍경이 과연 세계적 絶美를 자랑할 가치가 없는 바는 아니다. 그러나 산은 아무리 보아도 산이요 물은 아무리 보아도 물이었다.· · ·나는 처음 그 한 곳을 본 후에 금강의 全景을 예히 추측하고 구구이 다 보려고 아니하였으나· · ·
라는 감상을 읊고 있다. 이 수필법문은 크게 두 가지 내용을 담고 있는데, 하나는 금강산에 대한 신앙성 내지 민족관과 관련된 부분이며, 다른 하나는 여관에서 만난 기독교 신자의 신앙자세와 관련된 부분이다. 분량으로 보면 후자가 대부분을 차지하며, 대담내용까지를 구체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이들이 대종경의 채록과정에서 양분되어 전자는 전망품 5장으로, 후자는 신성품 12장으로 나누어지게 되었다는 말이다.
금강산 유람후의 법문을 통해 대종사는 3수의 시를 남긴다. 금강산 구경을 기념하기 위하여 읊은 步拾金剛景 金剛皆骨餘, 속인들에게 금강산을 두고 읊은 金剛現世界 朝鮮更朝鮮, 승려를 대하여 읊은 金剛現世界 如來渡衆生이 그것이다. 첫수의 금강산에 대한 대종사의 인식은 전술한 화엄경의 皆骨개념과 일치되고 있음을 알 수 있거니와, 대종경에 수록된 다음 수는 민족관을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있어서, 다른 법문과 연관시켜 보면 그 구조가 분명해질 것이다.
당연한 이치이지만, 이 전망품 5장 법문은 6장 법문과 민족의 장래를 밝히는데 있어서 같은 일치된 맥락이다. 6장법문은 수록법문이 비교적 장문이며 수필법문의 내용을 충실히 전하고 있다. 다만 수필법문에는,
<11>나는 혹 어느 때 “조선사람 된 것이 불행인가?” 하고 생각해 본즉 불행이 아니라 행이다. 어찌 행일꼬? 금강산이 조선에 있는 연고다. 조선은 반드시 금강산으로 인하여 드러날 것이다. 금강산을 말할 때 조선을 연상케 되고 조선을 말할 때 금강산을 연상케 되니 조선과 금강산과는 서로 떠날 수 없는 사이며 조선은 드러나기 싫어도 필경 금강산을 따라 드러나고야 말 것이다. · · ·금강산은 팔래야 팔 수 없고 살래야 살 수 없고 버릴래야 버릴 수 없는 하늘이 점지하신 조선의 보물이다. 그 주인이 아무리 學識없고 權利없고 가난하고 賤할지라도 故國山川을 다 버리고 동서남북에 遊離하여 남의 밥을 빌러 다닐지라도 “나야 조선을 여의지 않는다” 하고 堅立不動할 것이니 여러분은 결코 우리의 현상을 비관하지 말라. 無價의 重寶요 광명의 뿌리인 금강산은 아직도 우리의 것이요 미래도 우리의 것이다.· · ·
는 등의 매우 구체적인 표현으로 종시되어 있다. 일제시대인 당시 조국을 잃고 사방으로 흩어진 流民, 그리고 치하에서 허덕이는 동포들에게 현상을 비관하지 말라고 독려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것이 다만 對日抗爭에 그치지 않고 미래세계에 민족이 어떻게 존재하고, 어떤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 가를 설파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12>조선은 開明이 되면서부터 생활 제도가 많이 개량되었고, 완고하던 지견도 많이 열리었으나, 아직도 미비한 점은 앞으로 더욱 발전을 보게 되려니와, 정신적 방면으로는 장차 세계 여러나라 가운데 제일 가는 지도국이 될 것이니, 지금 이 나라는 점진적으로 魚變成龍이 되어가고 있나니라.
라는 관점과 같은 흐름으로 파악된다. 更朝鮮이나 魚變成龍은 조선이 세계에서 도덕의 부모국 정신적 지도국이 될 것을 의미하며, 일제의 지배를 받고 있는 상황속에서 堅立不動할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이와 같은 표현의 문자화가 가능했던 것은 교단이 사회에 널리 알려지지 않아서 일제로부터 조직적인 제약을 받던 시기가 아니었으며, 기관지인 월말통신 역시 몇 부에 불과한 내부문서였던데 기인된다 할 것이다.
最初法語의 하나인 强者弱者進化上 要法도 거의 같은 시기에 문자화되는데, 수필법문을 보면 대일민족관이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 즉 원불교 치초의 수필법문인 이는 이공주 수필의 弱者로 强者되는 法門으로 월말통신 1호에 수록되어 있다. 정전에서는 强弱進化에 초점이 맞추어져 대종사의 민족관에 관련된 내용은 생략되어 있으나, 수필법문에는 한국과 일본을 갑동리와 을동리로 비유하는 등 민족진로와 관련시킨 구체적인 내용이 수록되어 있어서 금강산법문과 같은 흐름을 확인시켜 준다.
후일 소태산대종사의 만년에 이르면 교단조직이 확대되면서 사회에 알려지고, 또 전쟁 상황에 들면서 동원체제 아래 자유로운 사고나 활동에 제약을 받게 된다. 교화에도 커다란 시련을 안겨주었을 뿐만 아니라, 민족에 관련된 직접적인 관점의 피력에 제재가 따른다.
참고문헌
- 권중달(2000), 중국인과 한국인의 민족관 차이, 중앙대학교 민족통일연구소
- 김재용(1999), 냉전시대 한설야 문학의 민족의식과 비타협성, 한국역사연구회
- 양은용(1997), 소태산대종사의 금강산법문과 민족관, 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
- 연국희(1985), 우리는 같은 독일인이다 민족동질성 간직하려는 동서독, 평화문제연구소
- 안호상(1983), 바른 민족관과 국가관은 올바른 국사인식에서, 한성대학교
- 정신철(2010), 중국의 민족정책과 조선족사회의 변화발전, 백산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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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3.07.13
  • 저작시기2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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