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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이야말로 분명히 그가 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나) 일제의 침탈이 거세지는 가운데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단발령이 공포되자 유인석은 1895년 11월 동지들과 함께 이에 대처할 방안을 논의했다. 이때 세 가지 방법이 제기됐다. 첫째는 자정치명(自靖致命)으로 나라를 빼앗긴 책임을 통감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어 조선 선비의 지조를 지키자는 것이었다. 둘째는 거지수의(去之守義)로 오랑캐의 지배하에 들어간 세상을 등지고 외진 곳으로 들어가 혼자서라도 대의를 지키며 도를 후세에 전하자는 것이었다. 셋째는 거의소청(擧義掃淸)으로 의병을 일으켜 목숨을 걸고 외세를 소탕할 때까지 싸우자는 것이었다. 의견은 ‘거의소청’ 쪽으로 모아졌다.
‘자정치명’에 따라 모두 목숨을 끊을 경우 도의 맥이 끊기게 될 위험이 크고, 또한 대항도 해 보지 않고 ‘거지수의’를 택할 수는 없다는 의견이 우세했다. 모인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유인석을 의병장으로 추대했다. 그러자 유인석은 고민에 빠졌다. 당시 그는 양모(養母)의 상중(喪中)에 있었기 때문이다. 나라가 위급하다고는 하나 선비가 모친의 상을 저버리고 거의(擧義)에 나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 일제의 침탈이 거세지는 가운데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단발령이 공포되자 유인석은 1895년 11월 동지들과 함께 이에 대처할 방안을 논의했다. 이때 세 가지 방법이 제기됐다. 첫째는 자정치명(自靖致命)으로 나라를 빼앗긴 책임을 통감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어 조선 선비의 지조를 지키자는 것이었다. 둘째는 거지수의(去之守義)로 오랑캐의 지배하에 들어간 세상을 등지고 외진 곳으로 들어가 혼자서라도 대의를 지키며 도를 후세에 전하자는 것이었다. 셋째는 거의소청(擧義掃淸)으로 의병을 일으켜 목숨을 걸고 외세를 소탕할 때까지 싸우자는 것이었다. 의견은 ‘거의소청’ 쪽으로 모아졌다.
‘자정치명’에 따라 모두 목숨을 끊을 경우 도의 맥이 끊기게 될 위험이 크고, 또한 대항도 해 보지 않고 ‘거지수의’를 택할 수는 없다는 의견이 우세했다. 모인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유인석을 의병장으로 추대했다. 그러자 유인석은 고민에 빠졌다. 당시 그는 양모(養母)의 상중(喪中)에 있었기 때문이다. 나라가 위급하다고는 하나 선비가 모친의 상을 저버리고 거의(擧義)에 나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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