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석기와 신석기 - 석기시대의 정의와 쟁점들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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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구석기와 신석기 - 석기시대의 정의와 쟁점들에 관하여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서론


2. 구석기시대

1) 구석기시대의 정의

2) 한반도의 구석기


3. 신석기시대

1) 신석기시대의 정의

2) ‘빗살무늬토기’의 출현

3) 농경문화의 발생

4) 농경문화의 독자 개발설

5) 벼농사의 시작


4. 결론

본문내용

’이 어떠한 것인지에 대한 인식은 다소 부족한 것이 현실이다. 벼농사가 고급 농경 기술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농경의 발달 순서가 잡곡농사에서 벼농사로 진행된다는 점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다. 실제로 사학계에는 신석기 말에 벼농사를 시작했다는 설이 있는데, 벼농사는 청동기시대적 특징으로도 볼 수 있기 때문에 역시 선사시대의 연대 구분 기준으로서 중요하게 작용하고 있다.
[사진2] 경기 연천군 왕징면 임진강변 고구려 보루 유적인
무등리 제2보루 출토 탄화미(오른쪽)와 탄화기장(왼쪽)
벼농사의 한반도 유입 경로에는 육로전파설, 황해전파설, 해안선전파설의 있으며, 현재 가장 유럭한 설은 해안선전파설이다. 그 이유는 탄화미와 반월형석도 등 청동기적 특징을 가진 증거들이 요동쪽에서부터 황해안의 해안선을 따라서 분포해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반월형석도는 벼를 수확하는 데에 쓰였던 농기구로, 청동기 유물로 알려져있다.
벼농사의 시작 시기를 규정하는 데에는 신석기설과 청동기설, 두가지 설이 있다. 신석기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벼농사의 증거인 ‘탄화미’의 연대가 기원전 3000년 전으로 신석기 말 쯤인 것을 지적한다. 따라서 본격적인 논농사가 아닌 원시적 형태이더라도 벼농사가 이루어지고는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벼농사의 시작 연대가 신석기라고 해서 신석기인들이 쌀을 조리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니었으며, 생산 곡물이 잡곡에서 쌀로 넘어간 것은 훨씬 후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탄화미가 증거로서 불충분하며 근거가 빈약하다고 여기는 사람들 가운데서 청동기설을 등장하는 학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벼를 수확하는 데에 쓰이는 반월형석도가 유입된 것이 청동기 때였으나, 청동기 초기에도 농사는 생계 유지 위주의 밭농사였다. 따라서 신석기시대라고 해도 밭농사만이 농경 사회의 전부는 아니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물론 탄화미의 연대는 신석기에 해당하며, 계속해서 신석기 후반의 것으로 알려진 탄화미들이 발견되고 있는데, 문제는 그 탄화미들이 벼농사를 겪고 난 뒤의 씨앗인지, 벼농사를 지어서 얻은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어딘가에서 얻게 된 것인지는 알 수 없다는 데에 있다.
4. 결론
구석기와 신석기는 시기 상 지금까지 남아있는 역사적 기록이나 자료가 많지 않다. 따라서 연구 역시 제한적일 수 밖에 없으며, 학설을 증명해줄만한 증거도 미비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연구자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마련된 증거과 사실들을 최대한 활용하여 보다 더 객관적이고 논리적인 가설을 마련하는 것이다. 역사학은 시대 간의 인과관계와 그것이 갖는 의미들을 무시할 수 없으므로 그 토대가 되는 고대사의 기초를 충실히 다지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한국의 고대사 연구는 시작부터 일본의 식민사학자들에 의해 진행되어 객관성과 신뢰성이 떨어지는 논리틀 위에 서게 되었다. 많은 학자들이 이 굴레로부터 벗어나고자 하였으나, 이미 인식 구조 안에 깊게 자리한 식민사관의 논리는 쉽게 떨쳐낼 수 없었다. 게다가 식민사관의 반대급부로 등장한 민족주의사관 역시 단순히 식민사관에 반대하고 한민족의 우월성을 강조할 뿐, 새로운 인식의 틀을 제시하지는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한국의 고대사 연구가 나아가야 할 길은 아직 험난해보인다.
구석기의 시대 구분 논쟁은 철저히 문화인류학적 보편성을 염두에 두고 인식되어야 할 것이다. 구석기의 경우, 신석기와 달리 현대적 의미의 ‘사회’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반면 신석기와 관련한 논쟁들은 ‘사회’와 ‘문화’가 등장한 이후의 역사에 대한 언급이므로 한민족과 한국인에 대한 명확한 개념 정립 없이 분석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객관성의 유지를 위해 지양되어야 할 것이다. 민족주의적 역사 관념이 항상 주관적이거나 감정적인 것은 아니지만, 한일 양국 간의 역사적 배경 상 각국의 민족주의적 관념에 주관성과 감정이 개입할 여지가 큰 것은 부인하기 어렵다.
빗살무늬토기의 형성 과정이나 농경문화의 발달 과정은 이후 청동기에 들어선 고대국가들과 그 역사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에 더더욱 객관성을 유지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농경문화 발달의 시기와 벼농사의 시작 시기가 곧 고대국가 성립 시기와 직접적인 관련을 갖기 때문이며, 이는 사회 발전 단계 상 농경문화가 사회상의 변화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여기서, 삼시기법은 전세계적으로 보편화 된 시대구분 기준이지만,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토기를 기준으로 하는 것이 더 의미 있는 구분이므로 반드시 삼시기법에 따라 시대를 구분해야 하는가 역시 논의해 보아야 할 점이며, 삼시기법을 대체할 대안으로 어떤 시대 구분법을 도입할 지에 대해서도 담론을 형성해야 할 것이다.
본 보고서에서 가장 비중있게 다룬 농경문화의 독자 개발설은 식민사학에 의한 빗살무늬토기 북방기원설과 한민족 형성의 2원적 교체론, 청동기 벼농사설 등 뿌리 깊은 식민사관의 논리에서 벗어나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 학설로 평가할 만하다. 민족주의적 시각에서 벗어나 문화인류학적인 논거들을 도입하여 한반도의 신석기 문화를 묘사하는 데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역사학이 이념과 완벽히 유리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 할 수도 있을만큼 어려운 일이나, 역사가들은 이념을 초월하여 객관성을 유지하려는 노력을 끊임없이 해야만 하며, 농경문화의 독자 개발설처럼 문화인류학, 사회학 등과의 연계를 통하여 객관성을 확보하는 것도 역사학 연구의 발전에 크게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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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워드

사학,   한국,   고대사,   석기,   구석기,   신석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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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2.10.23
  • 저작시기2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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