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난고로 본 18세기 각사 서리의 존재양상에 관한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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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이재난고로 본 18세기 각사 서리의 존재양상에 관한 고찰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목 차


1. 문제제기
2. 대갓집 겸인인 각사 서리들
3. 서리와 하급관원 사이의 갈등
4. 맺음말

본문내용

이유였다. 권세가의 자제들은 이 핑계 저 핑계 대며 당직 근무를 다른 관원에게 미루었다. 그런 까닭에 그것을 떠맡지 않으려는 다른 관원과 갈등을 빚었는데, 그럴 때는 하인과 서리가 양쪽을 오가며 번거로운 심부름에 시달렸던 것이다. 1771년 6월 28일 일기에는 경화(京華) 부유한 자제는 작록(爵祿)을 아낄 줄만 알고 번(番)을 드는 일은 전적으로 향리(鄕里)에게 미루는 실정을 탄식하는 글이 보인다. 황윤석은 문벌이 없는데다 호남출신의 한미한 선비 이 문제에 대해서는 배우성(2006)의 논문 참조. 배우성은 ‘서울과 지방’을 대비하여 황윤석의 ‘지방의식’ ‘지방지식인의 정체성’ 문제를 다루면서, 황윤석이 “그는 지방보다는 호남을 고민했으며, 호남보다는 호남의 선비를 고민했다.”라는 결론을 내린 바 있다.
필자는 ‘황윤석이 호남인의 관점에서 본 호남차별 문제’를 좀 더 구체적으로 접근하고자 별도의 원고를 작성하여, 2008년 6월 28일 동양한문학회에서 발표할 예정이다. 황윤석은 호남출신 지식인으로서 중앙 관료 사회에 진출하여 봉직하는 동안, 매우 예민하게 호남 소외의식을 느끼곤 했다. 그가 예민하게 느꼈던 만큼 그는 나름대로 그 문제의 원인과 대책을 분석하면서 실천적 대응을 했다.
여서, 하급관원생활의 고달픔을 피하지 못한 채 고스란히 겪은 것으로 보인다.
요컨대, 신분제 사회에서 서리나 하인의 고통이 하급관원에 비할 바가 아님은 상식적인 상황이기에 새삼스럽지 않고, 하극상처럼 보이는 갈등이 빚어진 것은 당시 사회 상황과 관련하여 새삼 주목되는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 장에서는 각사 서리, 특히 대갓집의 비호를 받는 각사 서리와 하급 관원의 갈등 상황을 구체적으로 정리해 보았다.
4. 맺음말
이상에서 이재난고의 1778년 사복시, 그리고 1786년 전생서, 두 곳의 서리 및 하예 명단을 중심으로 18세기 중앙 각사의 서리들의 활동과 그들과 권세가와의 연계성에 대해 고찰하였다. 이조 후기 서울의 각사 서리에 대한 학계의 선행 연구에 비추어 볼 때 서리들과 권세가의 연계성 문제는 기존에 보고된 것과 일치한다. 그러나 그러한 상황에서 하급 관료 생활을 했던 황윤석의 상세한 일기 기록을 통해, 서리들의 활동에 대해 그간 전혀 알 수 없었던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국면들을 알게 된 것은 본 연구의 의의라고 하겠다.
이재난고는 일기 자료인 까닭에 하루에 일어난 일이 시간 순서대로 나열되어 있어서, 그 자체로는 마치 CCTV 기록 테이프와 같다. 그 테이프 자체가 어떤 문제나 사건을 구성해서 그 인과 관계를 알려주지는 못하지만, 막상 어떤 문제에 부딪쳐서 접근하고자 할 때에는 결정적 단서를 준다. 뿐만 아니라 그 기록을 자세히 살피면 그 기록 내에 있는 사건 간의 인과 관계와, 기록자의 내밀한 심리 및 의식 상태를 재구성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본 연구는 그런 점에 착안하여 18세기 각사 서리들에 대해 그 활동상과 인맥관계를 고찰하였다. 서리들이 대갓집 권세가와 연계되어 있음으로 해서 생겨나는 하급관원과의 갈등 양상은 그간 학계에 보고된 바가 없었기에, 비록 미세한 사건을 통해서나마 서리들의 실무 농간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짐작하는데 일조할 수 있을 것이다.
본고는 18세기 각사 서리들의 일상생활과 실무 행정 속에서의 인간관계를 살펴보는 데는 유익했지만, 이들이 겸하여 도가(都家) 활동을 한 실상이 어떠한 것인지,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그들과 연계된 대갓집과 관련하여 고찰하지는 못했다. 서리들의 숫자와 대갓집의 재정 및 권세가 지닌 상관성을 고찰할 수 있어야 이 문제에 대한 깊이 있는 접근과 분석이 가능할 터이나, 필자가 고전문학연구자로서 가져온 관심과 역량으로는 그 문제에 접근하거나 그 문제가 가진 깊은 의미를 알아차리기 힘든 영역이었음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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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8.11.28
  • 저작시기20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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