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의 역사와 태국의 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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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서론

▶본론
▲전근대시기
▲유럽열강의 침투와 독립의 유지
▲제 2차 세계대전과 이중외교
▲전후 친미외교
▲캄보디아 사태와 태국의 입장
▲아세안과의 관계

▶결론

본문내용

이 지역 모두에 부와 개발을 확신시킬 수 있는 경제적 엔진이 될 것으로 인식했다. 외국의 비평가들은 이 같은 차와릿의 주장을 새로운 제국주의로 혹평하기도 했다. *따라서 태국의 지역패권 추구가 앞으로 이 지역에서 긴장 관계를 야기시킬 가능성을 충분히 예상해 볼 수 있다.
▲아세안과의 관계 ⇒ 인도지나반도 국가들을 제외한 아세안 국가들-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필리핀, 싱가포르, 브루나이- 과 태국과의 관계는 상대적으로 중요성이 덜하다고 볼 수 있다. *아세안은 태국을 포함하여 1967년 지역협력기구로 탄생되었다. 이 기구는 주로 경제협력을 목적으로 했다. 구성국들은 광의적으로는 유사한 개발수준을 유지하며 상호경쟁적인 위치에 있다. 군사적으로는 쌍무협력관계를 맺고 있다. 태국군은 말레이시아나 인도네시아와 군사 협력프로그램을 추진하고 있으며 이따금 아세안은 이 지역의 중립지대화를 위한 장이 되기도 했으나 구체적인 프로그램을 갖지 못했다. 이와 관련한 진일보된 조치는 1993년 7월에 만들어진 아세안 지역포럼이다. 최초로 미국, 중국, 일본, EU, 호주, 러시아는 아세안 국가들과다자안보포럼을 구성하게 된 것이다. 또 다른 지역기구인 *아시아.태평양 경제 협력체(APEC)도 이즈음에 만들어 졌으며 이 기구는 경제적 문제뿐 아니라 정치적 문제도 다루게 되었다. 태국은 이 두 기국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베트남 전쟁과 캄보디아 내전에서 아세안은 미국의 개입을 찬성하지 않으면서 반공적인 자세를 견지했다. *태국은 SEATO체제하에서 미국의 베트남전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이런 점에서 태국의 태도는 다른 아세안 국가와는 달랐다. *그러나 아세안은 이러한 상이점을 포용할 수 있었으며 캄보디아 내전의 평화적인 해결을 위한 이니셔티브를 가질 수 있었다. 1980년대 말 찻차이수상은 베트남과 우호적인 과계를 갖기를 원하여 전후 베트남의 재건을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또한 비공식적으로 일본과 합동해군훈련을 제의했으며 아세안 국가들과는 전혀 사전 협의를 하지 않았다. *이 같은 사건은 단적으로 태국과 아세안 관계의 특성을 보여 주고 있다.
같은 아세안 국가들이지만 태국을 제외한 국가들은 공동의 이해관계가 걸려 있는 해양의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으나 베트남과 중국간의 긴장 문제에 대한 관심은 덜하다. *태국은 아세안의 구성국으로 책임과 의무를 느끼면서도 인도지나 문제에 대해서는 다른 아세안 국가들과는 다소 다른 노선을 견지하고 있다. *그러나 1991년 아난 수상은 태국은 아세안과 대륙부 동남아 국가들 특히 베트남과의 가교역할을 할 것이며 최종적인 외교적 지지를 구할 수 있는 아세안을 중시하고 있다고 했다. 즉 인도지나 국가들을 태국 외교의 내권이라고 한다면 아세안은 외권이라고 할 수 있다.
아세안 국가 중 유일하게 말레이시아만이 태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다. 그리고 이들 국경지대에는 타이족과 말레이족이 혼재해 있다. 또한 종교적으로는 이슬람과 불교가 공존한다. 남부 말레이 반도의 주들은 과거에 태국에 속국이었으나 20세기초에 영국에 할양되었다. 태국 남부의 빳따니, 얄라, 나라티왓 주는 태국보다는 말레이적 색채가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도시에는 중국인과 태국인들이 거주하고 있으나 지방에는 무슬림들이 대거 거주하고 있다. 1960년대 중에 이 지역에서 태국 공산 반군들과 말레이 반군들의 테러 활동이 자행됨으로써 외교적인 문제가 발생하기도 했으나 더 이상 이것은 문제가 되지 못하고 있다.
▶결론
현재까지의 태국의 외교 역사를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태국이 외교 기본방향은 이념을 초월한 전 국가와의 개방외교 내지는 실리선택 외교로 동남아시아의 평화와 자유중립체제를 장기적으로 추구해 오면서 제 2차 세계대전 후 반공 및 친 서방 외교정책을 유지하여 왔으나, 서기 1970 년대 중반부터 이를 버리고 중립외교 노선을 견지해오고 있다.
이에 서기 1975년 인도지나반도의 적화 이후부터는 중국, 인도지나반도 3개국, 소련 및 동국권 국가들과의 강력한 관계개선으로 실리외교를 추진하는 반면 베트남의 팽창주의에 대항하기 위해 ASEAN을 통한 지역협력강화 등 다면적 안보외교를 강화해 나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사 결과 국제관계에서의 현명한 행동이 얼마나 국가의 운명에 영향을 미치는가를 알게 되었다. 리포트를 작성하며 태국의 탁월한 외교 정책들을 엿볼 수 있었고, 이와는 대조되는 부분이 많았던 우리나라의 잘못되었던 정책에 대해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다. 서구 열강의 침탈시기 태국은 미리 사절단을 보내고, 역사를 거울삼아 외세의 기술과 힘에 대해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으며 결코 과소평가 하지 않았고, 비록 약소국이었지만 식민지 지배세력들을 상호 견제시키는 특유의 외교정책을 개발하여 영국과 프랑스로부터 중립을 이끌어 내기도 했다. 또한 시대의 흐름을 읽어 강한 나라에 편승하여 1차 세계대전 발발시에는 승전국의 입장에 서서 국제 연맹에 참여, 국제적 위신을 드높일 수 있었다. 불평등 조약도 점차 폐지되어졌고,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과 일본을 대상으로 한 이중외교로써 편승한 나라의 반대쪽과 대립도 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외세를 잘 알지 못하고 쇄국 정책을 펴는 등의 실수로 말미암아 외세의 지배를 받게 되는 치욕스러운 역사를 안게 된다. 또한 우리의 군대로 승전국이 될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 우리나라가 일제 강점기 말 스스로의 손으로 주권을 쟁취하지 못했다는 것에 대해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다. 광복 전에 5일만 일본이 우리나라에서 버티었더라면 우리나라는 그때 계획하고 있던 서울 침투작전으로 승전국의 입장에 설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그 때문에 우리나라는 우리나라의 군대를 가지고 돌아올 수 없었고, 애국 거장들은 개인 자격으로밖에는 올 수 없게 되었으며, 남과 북으로 갈라지는 신세가 되고 만 것이다.
한편으로는 국제 관계의 외교 정책에 있어서 많은 것을 배웠지만, 우리나라의 암울했던 역사를 생각하며 씁쓸하기도 했던 조사였다.
●참고문헌-태국학 입문/김홍구 저//요설 태국학/이한우 저//thaistudies.or.kr//부산외대 태국어과 홈페이지//다음 카페 락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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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7.12.19
  • 저작시기2007.12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443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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