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의 흐름 ) 역사의 쟁점에 대한 조사, 불멸의 이순신 드라마 속 이순신과 원균 명장론에 대한 역사적 쟁점 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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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사의 흐름 ) 역사의 쟁점에 대한 조사, 불멸의 이순신 드라마 속 이순신과 원균 명장론에 대한 역사적 쟁점 조사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주제 선정 이유
2. 역사적 쟁점과 관련한 조사
3. 출처 및 참고문헌

본문내용

는데, 그에 대한 감정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이순신과 원균은 서로 대립적인 관계로 잘 알려져 있는데, 이순신과 원균은 대표적인 악연으로 묘사되며 서로가 서로를 배척했다는 사실은 기록에서 살펴볼 수 있었다. 특히 이순신이 원균을 싫어했던 몇 가지 이유가 있는데, 원균의 술주정과 거짓말 그리고 행실의 바르지 못함을 들 수 있다. 다만 원균의 장수로서의 무능력함 자체에 대한 비판(무능함을 감추려고 하는 거짓말에 대한 비판은 있었음)은 추가로 확인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러한 내용에 관한 역사적인 근거 자료가 「난중일기」라고 하는 이순신의 주관적인 시각과 판단에 근거해서 작성된 자료라는 점을 보면 원균에 대한 내용이 온전히 사실에 입각했다고 판단하기에는 어려움이 따른다. 만약에 이 사실을 검증할 수 있는 또 다른 자료가 바탕이 된다고 하면 맥락이 충분히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의미를 찾기 위해서 당시의 임금이었던 ‘선조’의 생각을 들여다 보고자 관련된 사실들을 찾아보았다.
비변사가 수사 원균·이순신의 승전보를 아뢰며 논상을 청하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전라우도 수사 이억기가 좌수사 이순신, 경상 우수사 원균과 협동하여 적선 39척을 쳐부수었습니다.
- 조선왕조실롯 선조 28권, 25년(1592 임진/명 만력 20년) 7월 9일 병인 3번째 기사 중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조선이 단독으로 전투에서 승리한 내용이지만, 선조는 전란 직후 논공행상을 의논하던 도중 중국이 군사를 동원해서 전쟁에서 승리했기 때문에 모든 공로는 장수들이 아닌 명나라 군대와 그들을 데리고 온 자신과 자신의 세력들에게 있다는 취지의 내용을 이야기 한다. 사실 전란 당시 명나라 군대의 수탈은 왜군의 만행을 능가하는 것이었다. 우리나라 조정은 나라를 위해 싸우는 우리 장수들이 아닌 명나라 병사들을 위해 군량미를 대야만 했다.
선조는 한양으로 환도하고 난 이후 그의 입지를 다지기 위해서 이순신을 제거하기 위한 정치적 작업에 들어가는데, 이 바탕에는 이순신을 대신해줄 원균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바로 이 선조의 판단에 의해서 원균이 선무 일등공신이 되는 계기가 되었다.
원균의 등급에 대해 의논하다.
회계하기를, “원균은 당초에 군사가 없는 장수로서 해상의 대전에 참여하였고, 뒤에는 주사를 패전시킨 과실이 있었으니 이순신·권율과는 같은 등급으로 할 수 없어서 낮추어 2등에 녹공했던 것인데, 방금 성상의 분부를 받들었으니 올려서 1등에 넣겠습니다.”
- 조선왕조실록 선조 163권, 36년(1603 계묘/명만력 31년) 6월 26일 신해 2번째 기사 중
여기에 임진왜란을 승리로 끝내기 위해서는 조선의 명장 이순신을 제거해야만 한다고 판단한 왜는 거짓 정보를 권율에게 흘리고 이 보고를 들은 선조는 한산도에 명령을 내리는데, 전라도 좌수영이었던 이순신은 이미 여수로 간 직후인데다 풍랑으로 인해 남해도에 머물고 있는 상황이어서 선조의 명령을 따를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순신에게 벌하는 것을 대신들에게 의논하도록 하다.
비망기로 우부승지 김홍미에 전교하였다. “이순신이 조정을 기망한 것은 임금을 무시한 죄이고, 적을 놓아주어 치지 않은 것은 나라를 저버린 죄이며... (중략)
이렇게 허다한 죄상이 있고서는 법에 있어서 용서할 수 없는 것이니 율을 상고하여 죽여야 마땅하다. 신하로서 임금을 속인 자는 반드시 죽이고 용서하지 않는 것이므로 지금 형벌을 끝까지 시행하여 실정을 캐어내려 하는데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대신들에게 하문하라.”
- 조선왕조실록선조 86권, 30년(1597 정유/명 만력25년) 3월 13일 계묘 2번째 기사 중
이를 계기로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에서 파직하고 원균을 임명하면서 상황은 선조의 뜻대로 이루어지게 된다. 하지만 이것이 역사적 비극이자 원균의 부정적 평가의 서막을 알리는 계시가 되었다. 원균이 산도수군통제사가 되었을 때, 이순신이 명령을 어긴 것이 아니라 명령을 받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결국 부산포로 출정하고 칠천량해전이 시작된 것이다. 칠천량해전의 대패로 무적함대는 모두 사라지고 해상 주도권마저 빼앗긴 이 역사적 사실은 비겁한 선조의 선택으로 인해 발생한 결과이다. 이 칠천량해전의 대패 이후 선조는 이순신을 복귀시키고 이때 이순신은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고, 미천한 신도 아직 살아있습니다.”라는 역사에 남아있는 말을 남긴다.
선조는 전란으로 인해 자신의 입지에 위협이 된다고 생각했던 장수들이 전사하자 자신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전사한 전쟁영웅인 장수들의 업적을 깎아내리는데, 호성공신과 선무공신 책봉과 같은 정치적 의도가 다분한 행동들을 한다.
역사적 기록이란 승자의 눈과 입으로 전해진다고는 하지만, 선조는 이순신을 대신해서 원균을 선택했던 결과에 대한 책임회피로 원균을 명장으로 추대할 필요가 있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리 보아도 원균이 이순신을 대체할 수 있는 인재로 판단하기에는 그 근거가 부족하지만, 본인의 과오를 덮기 위해서 이순신을 저평가하고, 원균 역시 칠천량해전에서 대패한 이후 손절해야만 했던 선조의 의중이 담겨 있지는 않을까. 물론 선조가 전후에 민심을 살피기 위해 노력했던 모습을 보자면 사악하고 나쁜 임금인 것만은 아니다. 선조 역시도 이순신이나 원균처럼 기록이 모든 사실을 평가하는 기준이 된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한다.
드라마, 영화와 같은 대중문화 뿐만아니라 중국의 동북공정, 일본의 역사 교과서와 같은 다양한 방면에서 역사왜곡이 일어나고 있다. 다만 대중문화 분야에서는 사실과 허구 사이의 경계를 어디까지 예술이라는 문화 장르로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까에 대한 논의가 지속되고 있으며, 중국의 동북공정과 일본의 역사 교과서 왜곡의 문제와는 결을 달리한다고 볼 수 있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우리 역사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서는 전 세계에서 쉼 없이 발생하고 있는 사실의 왜곡을 현명하게 막아낼 수 없다는 것이다. 대중문화의 역사 왜곡을 논하기 전에 우리 스스로가 그 역사적 맥락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사실과 허구를 명확하게 구분하는 냉철한 시각을 가져야 할 것이다.
3. 출처 및 참고문헌
- 조선왕조실록 원문과 해석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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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10페이지
  • 등록일2023.01.05
  • 저작시기20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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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11924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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